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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한국근현대미술전 에서 다시 주목되는 박수근 화가!

by 갖고싶은예술 2023.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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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근은 대한민국의 화가로써, 단순화된 구도와 선, 회백색의 화강암같은 질감으로 우리의 토속적인 정서를 주제로 담은 그림을 그린 화가입니다! 박수근의 화풍이 한국근현대미술에서 어떻게 영향을 끼치며, 아직까지 대한민국 명실상부 대표 화가가 되었는지, 그의 생애와 작품들소개,주제 그리고 작품의 가치에 대해 상세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박수근의 생애

    그는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밀양박씨이며, 개신교를 믿었으며 그의 학력은 양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40년 아내 김복순과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셋, 딸둘을 두었습니다. 박수근은 7세 때 아버지가 광산업에 손댔다가 실패해서 집안이 급속히 기울었습니다.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미술에 소질을 보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로의 진학은 어려웠으며, 당시엔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대세였기 때문에 화가의 꿈을 접으려 했으나 박수근은 스승도 없이 혼자 그림공부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8세 되던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했습니다. 이 당시에 입선은 조선인이 화가로 인정받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매우 기뻐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있어 그는 대신 어려운 살림을 도맡아 했었던 탓인지 1933년부터는 연이어 세 차례 낙선의 쓴맛을 보게 됩니다. 그의 나이 21세때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아버지는 늘어난 빚더미로 금강산으로 떠나면서 가족마저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박수근은 홀로 춘천으로 옮겨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림 그리기에 정진하여 마침내 1936년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 〈일하는 여인〉으로 두 번째 입선을 하게 됩니다. 전쟁 중이라 생계가 막막해진 그는 헐값으로 화방에 그림을 팔아 겨우겨우 생계를 연명하던 중, 미군 PX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자리를 얻게 되고,이때 소설가 박완서를 만나게 됩니다. 미군 PX에서 근근이 모은 돈으로 박수근은 창신동에 작은 집 한 칸을 마련했고 전쟁과 피난으로 놓았던 붓을 다시 잡습니다. 이후 휴전이 되고 새로이 생긴 '국전(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서 입선하여 남한 미술계에서 화가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특유의 소박한 인물과 풍경이 굵고 검은 윤곽선에 황갈색의 색채와 두터운 질감, 명암과 원근이 없는 단순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작고할때까지 33년동안 화가로 활동했으나, 6.25전행으로 인한 공백이 있어 그림을 그린 기간은 10년에 불과할만큼 짧고, 그의 작업은 까다롭고 오래걸려 작품의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반도화랑을 통해 외국인들에게 한달에 한두번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한국에 온 미국인 미술 애호가들이 그의 작품을 샀습니다. 그 중에서 단골 고객은 미국 대사관 문정관인 그레고리 헨더슨의 부인이었고, 캘리포니아 거주하는 마가렛 밀러 여사가 특히 박수근의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밀러 여사는 귀국 후에도 우편을 통해 박수근의 그림을 계속 사주고 화구를 부쳐주는 등 후원자 역할을 했습니다. 박수근 화풍은 점점 원숙해지고, 대상이 뚜렷해졌고 독특한 질감의 표현방식으로 독자적인 조형성을 이루게 됩니다. 해외에도 작품이 소개되기 시작하여, 뉴욕 월드하우스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 〈모자〉, 〈노상〉, 〈풍경〉이 전시되었고, 반도화랑 창설에 중심 역할을 했던 미국인 실리아 짐머맨이 소장했던 〈노변의 행상〉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동서미술전’에 출품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린 화가 박수근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린 화가 박수근

    박수근의 러브스토리

    박수근은 아버지가 재혼해 살고 있는 김화군 금성의 집에 왔다가 빨래터에 있는 지금의 아내 김복순을 보고 결혼을 결심하게 되지만 복순의 집안에서 의사집안 아들내미랑 약혼을 서둘렀고 이때문에 박수근은 상사병으로 몸져 눕기까지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 승낙을 받고, 둘은 1940년 2월 10일 금성감리교회에서 한사연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그의 아내는 몇 시간씩 박수근의 그림 모델이 되어주곤 했으며,이 당시엔 주로 맷돌 돌리는 여인을 모델로 하였습니다. 결혼 3개월 만에 박수근은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 서기로 취직이 되어 아내와 함께 평양으로 갔습니다. 휴일이면 평양의 화가들과 어울려 스케치도 나갔고, 일본 유학파들인 최영림, 장리석, 황유엽 등과 함께 ‘주호회’라는 그룹을 만들어 1944년까지 매년 동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1941년 박수근은 그의 아내를 모델로 그린 그림 〈맷돌질하는 여인〉을 제20회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15일 평양에서 해방을 맞은 박수근은 도청을 그만두고 금성으로 돌아와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으나, 금성은 공산 치하여서 기독교 신자인 박수근은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아야 했고, 이러는 와중에 1947년 차남 성남을 얻었으나 이듬해 장남 성소를 뇌염으로 잃게 됩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박수근은 가족들과 금성에서 몇 십리 떨어진 시골로 피신을 했지만 유엔군의 후퇴로 생명까지 위태로워지자 박수근은 가족들을 남겨 놓은 채 홀로 남하해야만 했습니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데다 전쟁 통에 두 살배기 3남 성인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근현대미술의 영향을 끼치다.

    해외에서의 연이은 출품 소식에 국내 미술계에서도 박수근의 작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1959년 그는 국전의 추천작가가 되어 8회부터 14회까지 매년 심사를 거치지 않고 국전에 출품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해에 그는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제3회 현대작가초대전 작가로 선정되었고, 이어 1962년에는 제11회 국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서양화 공모작들을 심사했으나 국전의 파벌 싸움과 심사 잡음이 가시지 않아서 다시는 심사를 안 하겠다고 아내에게 말했으며, 여기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을 알수있습니다. 같은 해 주한미공군사령부(USAFK)가 주선한 ‘박수근 특별 초대전’이 열렸는데, 이때 외국 애호가들이 상당수의 박수근 작품을 소장했다고 합니다. 그중 몇 점이 홍콩 인터내셔널호텔의 인터하우스에 선을 보여 ‘동양적인 유화’라는 매력적인 평을 얻기도 했으며, 이 시기가 박수근의 예술 전성기이기도 합니다. 40대 후반으로 작품 활동이 왕성했을 뿐 아니라 주제의 깊이나 표현 기법도 완숙에 이른 시기였습니다.  소재가 정감이 넘치고 화강암 같은 질감의 기법도 최상의 경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완숙한 작품을 선보임에 따라 박수근의 화단 내 위상과 예술적 평가도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전성기는 잠깐에 불과했고 작품에 한창 전념할 나이에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과음이 계속되면서 신장과 간이 나빠져 몸이 부었고 그로 인해 왼쪽 눈에 백내장이 발병했습니다.치료비가 없어 악화된 뒤에야 백내장 수술을 받았으나 결과가 좋지 않아 재수술 중에 시신경을 잘라내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짙은 안경을 끼게 됐고 한쪽 눈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다른쪽 눈마저 침침해져 가는 악조건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작품 〈할아버지와 손자〉가 마지막 국전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점점 증세는 악화되어 복통이 일어나고 소화가 안돼서 세브란스병원에 갔더니 진단 결과 신장염과 간염이 나왔으며, 1965년에 접어들면서 박수근의 간경화와 응혈증은 더욱 악화되어 4월 초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으나 회복이 어려워 5월 5일 전농동 집으로 퇴원, 6일 새벽 1시경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1세. 유해는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묻혔다가 2004년 4월 15일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작품이 인기있는 이유와 작업방법

    박수근은 유화 350점이내, 수채화,소묘,삽화를 합쳐 500점정도 되며,해외에 있는 작품은20여 점쯤됩니다. 박수근의 작품이 한국인에게 사랑받고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는 이유는작품수가 많지 않으며,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양구 박수근미술관,몇몇 대학 박물관 등이 주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고, 개인들이 보물처럼 간직하는 작품이 대다수여서 거래되는 작품은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호당 가격이 엄청 높고, 화랑들에 따르면 40여 년 전보다 작품값이 무려 1만배가 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받는 또 다른 이유는 작품성에 있습니다. 한국인 특유의 정서와 소박한 소재이기도 하며, 그의 그림에는 한국인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애정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담겨 있으며, 독특한 표현양식이 인상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감을 덧칠해서 발라올려 화강암같은 표면과 우둘두툴 거친 재질을 만들어 낸후, 여기에 단순한 선으로 대상의 형태를 새겨넣은 암각화 느끼을 줘서 마치 고향의 흙 같은 수수한 멋을 느끼게 합니다.

    뉴스인, 서민 화가 박수근의 삶

    서민 화가 박수근의 삶

    작품의 소재별 특성과 주제

    "노상","시장여인들","소금장수","기름장수","좌판"들이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박수근이 즐겨 그려온 소재이지만, 작품중에 "길위에 사람들" 은 남한에 정착하면서 새로 등장한 주제입니다.

    길거리에 길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주로 그리는 이유는 박수근 작품의 인물들의 공통점은 실내에 있지않고 주로 실외에 있습니다. 시장에서 물건파는 사람들, 노상에서 쭈구리고 앉아 대화하거나 쉬는 사람들, 남녀노소 아이들도 한결같이 집안이 아닌 마당이나 길거리에 있습니다. 이에 평론가 오광수씨는 " 박수근 작품에 있어 길이란 대단히 중요한 공간이며 의미이다. 길은 작은 광장이기도 하며 놀이의 공간, 쉬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단순히 길위의 사람들은 오고가는 것을 떠나 물건을 사고팔고, 때로는 모여앉아 쉬며 대화를 나누는 쉼터이자, 놀이에 집중하는 아이들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1950-1960년대 서울에서 그린 "소금장수","기름장수"."빨래터","시장의 여인들" 한결같이 여인을 그린점도 특징입니다. 6.25직후 서울은 폐허나 다름없었으며, 아이들이 뛰어놀 놀이터도, 노인들은 골목에 쭈구리고 앉아 있었으며, 가족을 먹여살리기위해 여인네들은 노상에서 광주리에 물건을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그들에게 노상은 생활의 터전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름장수(1953)-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의 기억으로 창신동 집골목에 기름장수가 살았다고 합니다. 글을 모르는 그를 위해 엄마가 편지를 읽어주면 기름 한 병을 주고 가곤했다고 합니다. 두상이 작고 어깨가 좁은 아낙의 모습에서 고단한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기름장수
    기름장수

    빨래터(1950년대)-여러점을 그렸는데 그중에 한점이 최고 경매가를 기록했습니다. 박수근이 빨래터를 자주 그린 이유는 아내 김복순을 처음 본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며, 노랑,분홍,옥색등을 입혀 생동감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빨래터
    빨래터

    아기업은 소녀(1953)-가난의 표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돌볼 사람이 없어 엄나나 누이가 아이를 없어서 키웄으며, 아이는 귀한 존재이고 미래의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아기업은 소녀
    아기업은 소녀

    앉아있는 여인(1963)-소금을 파는 아낙의 무료한 모습을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꽉 짜인 구도와 질감이 마치 종교화같은 느낌을 줍니다.

    앉아있는 여인
    앉아있는 여인

    박수근의 작품의 가치

    많은 평론가들은 '궁핍한 시대의 풍경' 또는 '헐벗은 인간상의 모습' 이라고도 비평했지만, 분명한건  그 시대는 궁핍했고,가난했으며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는 대상에 머물러 있지않고, 사람들끼리 나누는 감정의 교류까지를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삶의 힘겨움속에서 벗어나 일상 속에 잠시 휴식을 찾고,삶속에 녹아들어 삶을 영위하는 우리들과 이웃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보편적인 한 시대의 삶의 모습이며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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